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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의 무덤, 혼노지(本能寺)를 가다
혼노지의 입구. 京都市 中京区 寺町通御池下ル 下本能寺前町 522

혼노지의 입구. 京都市 中京区 寺町通御池下ル 下本能寺前町 522

 일본 교토(京都)에는 수많은 유적과 문화재들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가장 끌었던 것은 킨카쿠지(金閣寺)와 혼노지(本能寺)의 두 곳이었다. (킨카쿠지에 대한 필자의 다른 글 보기)
 
 킨카쿠지야 금각으로 인해 워낙 유명한 곳이지만, 반면 혼노지는 웬만큼 자세하다는 여행 가이드북에서도 다루지 않을 만큼 혼노지에 대해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혼노지가 일본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일본사 최대의 미스테리가 있는 곳'[각주:1]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크다. 왜냐면 저 유명한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1534-1582)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각주:2]으로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 때문이다.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1534-1582)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 1534-1582)의 초상화. 16세기 카노 모토히데(狩野元秀) 작.

당시 일본에 있던 서양인이 그린 노부나가의 초상화
 먼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 쓰자면 이 글이 끝도 없이 길어질 것이 뻔하므로, 간략하게만 소개하자면- 개인적으로 삼국지로 치면 조조(曹操), 로마사로 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와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이 오다 노부나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군웅할거의 혼란기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 16세기 경)에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인물로, 드라마틱하면서도 매력적인 불세출의 천재적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나간 과감한 혁신과 개혁, 강력한 카리스마, 냉혹한 현실감각 뒤에는 낭만적인 감각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 매력 덕분에 노부나가나 전국시대에 관한 책들은 물론 일본사 전체에 대한 책들까지 읽게 되었고, 제2외국어로 일본어도 공부하게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오다 노부나가가 나의 인생에 끼친 영향도 약간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당연히 일본 여행을 가게 되면 노부나가나 전국시대와 관련된 유적을 보고 싶었고, 특히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혼노지는 꼭 가보고 싶었던 것.

 하지만 현재의 혼노지는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그 곳은 아니다. 혼노지의 변 당시 소실된 것을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현재의 위치로 혼노지를 옮겨 재건할 것을 명해 그 후인 1592년에 재건된 것이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했던 옛 혼노지 자리에는 현재 호리카와 고등학교(京都市立堀川高等学校)와 교토 시 복지 관련 시설(京都市本能特別養護ルーム)이 들어서 있다.[각주:3]
혼노지(本能寺)의 위치

혼노지(本能寺)의 위치. 큰 길가에 있어 찾기가 어렵지만은 않다?

 어쨌거나 혼노지를 찾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가이드 북 따위에 혼노지가 나오지 않으니 내가 미리 지도상의 위치를 확인하고 가야했는데, 교토의 골목은 생각보다도 더 복잡했다. 미리 혼노지의 위치가 있는 지도를 가져갔으면 좋았을텐데, 큰 길가에 있으니 찾기가 어렵지 않겠거니한 것이 오히려 화를 부른 셈. 한참을 헤멘 끝에 저 멀리 보이는 혼노지의 입구를 발견했을 땐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사실 혼노지를 찾는다고 점심 시간을 놓쳐버리기도 했었으니- 더더욱 반가웠다.

 혼노지의 입구엔 법화종 대본산 혼노지라는 현판과 함께 증 정1위 오다 노부나가 공 묘소라는 석비가 서 있다. 먼저 현판을 살펴보면 혼노지의 노 자- 우리 식으로 읽으면 능(能) 자의 오른쪽 변이 거(去) 자로 씌어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ヒ가 일본어로 읽으면 히, 즉 불을 뜻하는 것이므로 재난(火)이 물러가라(去)는 뜻으로 바꾸어 쓴 것이라고 한다.

 석비를 살펴보면, 노부나가의 이름 앞에 증 정 1위(贈 正一位)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노부나가가 죽은 후 정 1위의 위계가 주어졌기 때문이다.[각주:4]

혼노지의 본당

혼노지의 본당

 안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동네 절간같은 작은 문 덕분에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경내는 생각보다도 더 소박했다. 1415년에 창건된 이래 에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옛날에야 꽤 큰 절이었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본당과 산문, 노부나가와 관련된 건축물 몇 개밖에 없는 수준. 몇 명의 관광객들만이 산문 안을 거닐고 있었다.
노부나가 공 묘

노부나가 공 묘. 물론 노부나가의 유해는 없는 영묘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내 찾던 것이 있었다. 신장공묘, 즉 노부나가 공 묘라고 적혀 있지만 노부나가의 유해는 없다. 당시의 아케치 미츠히데조차 찾지 못한 노부나가의 유해가 무슨 수로 남아 있을까? 즉, 이 곳은 영묘(靈廟)다. 그런 노부나가의 묘는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각주:5], 이렇게 묘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또 혼노지라는 장소에 있으니 이 곳이 대표적인 노부나가의 묘소가 된 듯 하다.  
혼노지의 변 전사자들의 영묘

혼노지의 변 전사자들의 영묘.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이름도 보인다.

 경내 한 쪽에는 혼노지의 변 당시 죽은 이들을 위한 위령묘도 보인다. 노부나가가 아끼던 시동으로 잘 알려진 모리 란마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고보면 천하를 떨쳐 울리던 영웅이 자신의 시신조차 보전하지 못했으니, 너무나 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천하를 제압하며(天下布武), 마왕(第六天魔王)이라 불리워지며 많은 적들을 죽였던 그의 업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무상이라- 이 곳을 둘러보고 나올 때 든 생각은 바로 그 네 글자였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노부나가는 향년 49세였는데, 인생 50년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그다운 일생을 마쳤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부나가가 항시 즐겨 읊었다는 아츠모리(敦盛)로 이 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한다.

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比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一度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

인간 오십년
저 세상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번 태어나
죽지 않는 자 어디 있는가
  1. 노부나가 정도의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왜 아케치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켰는지, 배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등 다양한 설이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본문으로]
  2. 혼노지의 변이란 1582년 6월 21일, 노부나가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1528?-1582)가 반란을 일으켜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를 외치며 혼노지에 묵고 있던 노부나가를 공격, 노부나가를 불타는 혼노지 안에서 자결하게 만든 사건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3. 호리카와 고등학교의 뒤쪽(四条大宮)에 옛 혼노지 자리임을 가리키는 비석이 있다. 건물 공사 당시 불에 탄 옛 혼노지의 잔해가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본문으로]
  4. 오다 노부나가는 생전에 종 2위(從二位) 우대신(右大臣)이었으며, 죽음 몇 달 후 종 1위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더해졌다. 한참 뒤인 1917년에 역사적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 위계인 정 1위에 증위되었다. [본문으로]
  5. 대표적으로 오다 노부나가 공 본묘(織田信長公本廟) 석비. 교토 카미교구 츠루야야마쵸(上京区鶴山町)의 阿弥陀寺에 있는데, 이 곳에 노부나가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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