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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죄인의 전설 - 뮌헨 협정과 체임벌린 : 1938~1940 (2)

이 글은 내가 2009년 1학기에 작성한 글로, 제 10회 서울대학교 우수리포트 공모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글이다. 교양 수업(서양문명의 역사)에서 작성한 리포트라 부족한 점도 있고, 블로그에 올리기엔 글이 긴 것 같아 그동안 이 블로그에는 올리지 않고 있었는데 그래도 썩혀두는(?) 것보다는 올려두는 게 좋을 듯 해서 올려 본다.

리포트의 주제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던 1938~1940년의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의 대독(對獨) 정책에 관한 것이다. 나치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유명한 그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정적인 평가와는 다른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블로그에 한 번에 포스팅하기에는 글이 길기 때문에 세 번에 걸쳐 나누어 올린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Ⅲ. 대독 유화정책의 근본적 원인의 한 부분만을 올린다.

[다른 포스트] 한 죄인의 전설 - 뮌헨 협정과 체임벌린 : 1938~1940 (1)


한 죄인의 전설
뮌헨 협정과 체임벌린 : 1938~1940

목차
Ⅰ. 문제의 제기 : 죄인에 대한 의문
Ⅱ. 수데텐란트 할양 요구의 명분
Ⅲ. 대독 유화정책의 근본적 원인
Ⅳ. 제 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
Ⅴ. 결론 : 한 죄인의 전설


Ⅲ. 대독 유화정책의 근본적 원인

체임벌린은 뮌헨으로 떠나기 직전의 여러 연설에서 독일이 주장하는 요구의 정당성이 아닌 전쟁의 위험을 강조하였고[각주:1], 뮌헨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우리 시대의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이를 통하여 체임벌린의 목표가 평화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체임벌린이 그저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그토록 유화정책을 써 가면서까지 평화를 지키고자 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대영제국’의 국제정치와 국가전략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영국이 평화를 그토록 필요로 했던 현실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체임벌린이 대독 유화정책을 펼친 근본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먼저, 기존의 견해 중 당시의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볼셰비즘의 서유럽 파급을 나치즘이라는 극단적인 반(反)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히틀러를 통하여 저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를 검토해 보자. 실제로 소비에트 연방은 영국이 나치 독일을 ‘볼셰비키의 위협’을 저지할 수 있는 방파제로 만들고자 함이 뮌헨 협정의 의도라고 의심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마누일스키(D. Z. Manuilsky)의 “영국의 반동적 부르주아의 계획은 동남 유럽의 약소국가들을 독일 파시즘에 넘겨주어 독일로 하여금 소련에 대항토록 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공산주의의 승리를 늦추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연설에 잘 드러난다.[각주:2] 하지만, 체임벌린이나 영국 정부에게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각주:3] 물론 영국은 소비에트 연방의 세계 혁명이라는 장기적인 목표를 경계했으며, 또한 소비에트 연방을 유럽에서 배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입장에서, 잠재적인 위협이랄 수 있었던 소비에트 연방과 달리 나치 독일은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실체적인 위협이었다. 즉, 여러모로 독일 문제는 소비에트 연방에 관한 문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고 중대했다. 그러므로 이 견해가 뮌헨 협정과 대독 유화정책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 대독 유화정책이 상술한 것처럼 국제 정세의 어떤 변화를 노리고 취해진 것이 아니라면, 영국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대독 유화정책은 영국 자신이 처한 어떤 이유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상황은 1920년대의 대공황 이래, 1938년에도 아직 대공황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각주:4] 단도직입적으로, 이 시기의 영국은 쇠퇴일로에 접어든 대영제국― 영국 본토와 광대한 식민지―의 지배권과 평화를 유지하기에도 급급하였다.[각주:5] 요컨대, 이미 대영제국의 세계는 끝나 있었다.[각주:6] 먼저, 영국으로서는 당시 세계의 3대 긴장지역, 즉 동아시아와 지중해, 그리고 유럽에서 받는 위협을 단독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1940년 이후에 드러난 것처럼 3개 이상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또한, 식민지 질서의 유지도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간디(M. Ghandi)로 대표되는 인도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의 거세지는 독립 요구는 영국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제1차 대전기부터 이미 영국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있던 영연방(Common Wealth) 국가들마저도 미국에 가까워짐으로써 영국과는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요컨대, 너무나도 비대해진 제국은 자신을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진행되어 온 대영제국의 붕괴는 크게 가속화될 것이 분명했다. 세계를 지배하던 대영제국의 위상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제1의 강대국이었던 미국이나, 팽창정책과 경제회복을 통해 다시금 강국으로 부상한 독일, 그리고 세계 혁명을 선동하던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이미 퇴색되어 있었다. 거기에 새롭게 부상한 자본주의 후발 국가인 일본과 이탈리아의 존재 또한 만주와 중국, 에티오피아 등의 문제를 통해 대영제국의 국제적 지위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특히 경제력을 비교해 보자면, 1938년 독일의 국내 총생산은 합병한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도 영국보다 20% 가량 많았으며, 또한 미국, 독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3대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각주:7] 체임벌린으로서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즉, 독일과의 전쟁은 새로운 세계 대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영제국으로서는 승리한다 해도 제국의 유지를 장담할 수 없었으며, 패배한다면 그대로 제국은 무너질 것이 뻔했다. 따라서 전쟁은 회피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대독 유화정책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결론적으로,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은 현실적으로 국제 정세를 구조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수립되고 추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술했듯 영국은 독자적으로 국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보다 강한 나라와 손을 잡게 되면 영국은 자연스레 그 영향력에 휘둘릴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체임벌린은 독자적인 정책― 대독 유화정책을 구상하였다.[각주:8] 1938년과 1939년에 있었던 미국의 재정적 지원 제의를 그가 거절했던 것에서 그러한 의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유화정책을 통하여 독일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이른바 유럽 4강의 협력관계를 기초로 한 질서를 따르게 한다면 유럽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어 온 영국의 전통적 지위도 유지되는 셈이었고, 당연히 독일과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대영제국의 쇠락이라는 흐름을 피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쇠락을 앞당기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만일의 경우 또한 잊지 않았다. 유화정책이 실패하는 경우에는 전쟁을 피할 수 없었기에, 영국은 히틀러가 재무장을 선언한 다음 해이자, 체임벌린이 볼드윈(S. Baldwin) 내각에서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으로 있던 1936년부터 군비증강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국가 수입액 중 군비 지출액 비중은 2%에 불과했던 1935년과는 달리, 1936년에는 5%로 대폭 늘어났고 1938년에는 8%까지 늘어나 있었다.[각주:9] 간단히 말하자면, 체임벌린은 이중 전략을 구사하였다.[각주:10]

하지만, 체임벌린의 군비 증강은 방어적인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또 체임벌린은 외교력으로만 대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각주:11] 따라서 그의 그런 이중 전략이 효과적으로 먹혀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체임벌린은 너무나도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바로 히틀러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즉, 체임벌린은 히틀러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일례로 그는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난 후, 영국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히틀러를 보았을 땐 준엄하며 무자비해 보이는 얼굴이라 생각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그가 약속을 지킬,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각주:12]
그러나 히틀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38년의 체임벌린으로서는 알기 어려웠겠지만) 히틀러는 처음부터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원했으며,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도 아니었다. 뮌헨 협정을 통하여 히틀러를 멈춰 세움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몇 달 더 유지시킬 수는 있었다는 견해가 타당한 여지가 있으나,[각주:13] 결과적으로 체임벌린은 유화정책을 사용함으로써 히틀러에게 위험부담만 줄여 준 셈이 되었다. 그러나 상술했듯, 체임벌린이 취했던 전략적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은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즉, 체임벌린이 수데텐란트가 전쟁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믿은 것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잘못이 있다면 체임벌린이 유화정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그 상대가 히틀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 Taylor, A. J. P., 앞의 책, pp. 287; 조영주, 앞의 책, pp. 63. [본문으로]
  2. 1939년 3월 11일, 소련 공산당 제19차 당 대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 마누일스키의 연설. 김용구, 앞의 책, pp. 779-780. 소비에트 연방은 (프랑스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의무이행을 선행조건으로 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할 것을 규정한 조약을 체코슬로바키아와 맺고 있었다. [본문으로]
  3. Taylor, A. J. P., 앞의 책, pp. 259-260. [본문으로]
  4. 1935년의 GDP는 1925년의 GDP에 비해 4.7% 성장하였다. Economy of the United Kingdom, Wikipedia. [본문으로]
  5. Hillgruber, A., 『국제정치와 전쟁전략 - 제2차 세계대전』, 류제승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6, pp. 13-23. [본문으로]
  6. Buchanan, Patrick J., 앞의 책, pp. 414. [본문으로]
  7. Harrison, Mark,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 Six Great Powers in International Comparis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Military production during World War II, Wikipedia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8. Hillgruber, A., 앞의 책, pp. 21-22. [본문으로]
  9. Caplan, J., Nazi Germany,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pp. 181. [본문으로]
  10. Hillgruber, A., 앞의 책, pp. 22. [본문으로]
  11. McDonough, F., Neville Chamberlain, appeasement, and the British road to wa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8, pp. 36-40, 43. [본문으로]
  12. Buchanan, Patrick J., ‘Churchill, Hitler, and "the unnecessary war" : how Britain lost its empire and the West lost the world’, Crown Publishers, 2008, pp. 236. [본문으로]
  13. 히틀러는 베를린으로 돌아와서는 체임벌린이 자신의 프라하 입성을 방해했다며 화를 냈다. Henrik, E., Matthias, U.,『히틀러 북』, 윤종상 옮김, 루비박스, 2008, pp. 70. 그러나, 만일 뮌헨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더라면 당시의 독일군으로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기 어려웠으며, 또 반 히틀러 세력의 히틀러 체포 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므로 히틀러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Shirer, William L., 같은 책, pp. 230-231, 250-2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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