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119 TOTAL 2,580,791
완벽하지 못해 우울한, 어느 서울대생에게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혹시나 오해를 살까 해서 제목에 관해 풀어 쓰면, 서울대생들이 모두 우울하다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우울해 하는 일부 서울대생들에게라는 뜻이다. (굳이 이런 사족을 덧붙이는 것은, 스누라이프에도 같은 글을 먼저 올렸었는데 누가 우울하냐고 하는 댓글이 달려 있길래- 개인적인 경험담이기도 하니, 위의 표현에 공감하시는 분만 읽어 보세요)


 요즘처럼 추운 날이라 더욱 그럴지도 모르지만, 혼자서 쓸쓸히 도서관에서 책이나 읽고 있다 보면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그리곤 한 번 끄집어낸 불안한 생각에 몸을 맡기고 한동안 침잠한다.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상념들이 떠오른다. 아주 어린 코흘리개 시절, 어디서 주워들은 욕설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여기저기 써놓다가 크게 야단맞은 일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때에 괜시레 친구에게 욕을 해서 미안했던 일이라든가, 중학교 때 고마운 도움을 많이 준 친구와 싸우고 나선 졸업할 때까지 미안하단 말을 못하고 소식이 끊겨진 일처럼 먼 옛날의 일도 떠오른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왜 좀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같은 건 이미 수도 없이 되뇐다. 고등학교 때엔 유난히 날 아껴주시던 한 선생님을 실망시켜 드렸던 일도 떠오른다. 대학교 신입생 때엔 왜 그리 학점이 엉망이었는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같은 게임을 하느라 하루가 가는 줄 몰랐던 날들도 떠오르고, 하릴없이 인터넷에서 악플이나 달고 낚시글이나 쓰고 그러던 한심한 일들도 떠오른다. 수입도 없는 주제에 너무 돈을 많이 쓰거나, 괜히 잘못한 건 나인데 부모님께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쳤던 일들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하끈, 부끄러워서 쥐구멍이 있으면 어디론가 숨고 싶을 지경이다. 그 모든 일들이 부끄럽고, 미안하고, 죄스러워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이상하게도- 좋은 일이나 잘한 일도 많이 있을 텐데 나쁜 일이나 잘못한 일들이 더 잘, 그리고 더 많이 떠오른다.

 다행히 그런 기억들은 거의 전부, 미필인 시절들의 일들이다. '복학생'이 된 뒤로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인격이라는 것이 최소한은 만들어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아직은 멀었지만. 어쨌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의 좋지 않은 기억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탓은 아닐 게다. 지나간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든가 하는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덕목이 생각나지만, 사람의 심리가 언제나 합리적일 수만은 없는 게 또 사람의 심리 아니겠는가.

 공부만 하다 보니, 갑자기 우울증이라도 오려는 건가? 그러고보니, 서울대생의 4분의 1이 우울증 경험이 있다거나, 10명 중 1명은 정신 상태가 취약하다든가하는 서울대생에 관한 뉴스 기사들이나, 대학생활문화원에서 시행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들이 떠올랐다. 글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분수에 맞지 않는)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나로서는 스스로의 심리 상태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라고 생각했다-

 문득, 여기에서 예전에 읽었던 책의 일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으므로 생각나는대로 일부만 씀) 너무나도 무서운 느낌이 드는 푸른 빛이 눈 앞에 나타나더라도, 혹은 칼리(Kali) 여신이 해골과 피로 치장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그런 공포스러운 존재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마라. 그들이야말로 당신을 도와줄 존재, 혹은 그들을 인정하고 당신이 그와 하나임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그들에게서 달아나 숨게 되는 어두운 동굴이야말로 편안히 느껴지겠지만 실상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 티벳 사자의 서(Tibetan Book of the Dead)[각주:1] 중에서

  그렇다.

 그런 잘못한 일들조차도, 비록 철없던 시절의 과거의 나의 이야기라지만, 어쨌거나 그 또한 내가 짊어지고 온 시간들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애써 그런 기억들에게서 달아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욱 그 기억들의 무게가 무거워졌던 것은 아닐까.

 애써 아무런 문제나 단점이 없는-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물론 완벽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우리네 20대에 말이다. 공자는 마흔에 이르러 불혹(不惑), 일흔에 이르러 종심(從心)이라 하지 않았던가.[각주:2]

 서울대생이라는 이미지처럼, 나 역시 시험이라면 잘 봐야 되고, 또 뭐도 잘 해야 되고, 뭐도 잘 해야 되고 하는 일종의 강박증을 가졌을 지, 혹은 지금도 가지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기에 완벽주의의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 완벽하지 못한 자신에 만족하기 쉽지 않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은 물론이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잘못조차도 내가 쌓아온 업의 일부라 생각하기 싫다. 바로 그래서 무거운 고민이 나를 붙잡아왔던 게 아닐까.

 아마도 나 외의 다른 많은 학생들도 서울대생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만큼,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지 모른다- 물론, 나만의 고민이었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다른 학우들은 모두 건강하다는 것은.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이런 고민을 하는 학우들이 제법 있는 듯 하다.

 최근에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김난도 교수님의 칼럼을 일부 인용할까 한다.

다음날, 서울대학교의 캠퍼스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그렇게 선망하던 곳이다. 전일(前日)과 선명히 비교되는 점 하나는 학생들의 표정이 전혀 밝지 않다는 것이다. 웃는 학생도 장난치는 학생도 별로 없다. 교수휴게실로 돌아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교수들도 여간해서 웃지 않는다. 연구며 행정잡무에 치여 늘 탈진 상태다. 교수건 학생이건 이 교정 안에서는 모두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철학시간에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우리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한 고등학생이 되기보다는 성적 좋은 수재여야 했고, 행복한 대학생활을 누리기보다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학생이 돼야 했다. 좋은 데 취직했다고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제는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더 빠른 승진을 하는 것이 목표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성취다. 행복은 항상 뒷전이었다. 더 큰 성취가 바로 더 큰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애써 자기 최면을 걸며,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김난도 교수님께서 칼럼에서 쓰는 것처럼, 우리는 바로 저 '성취'를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달려왔을 것이다. 그것이 행복으로의 길이라며. 이제서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 와중에 저런 고민에 대해 고민에 대한 고민은 커녕, 곁눈짓을 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 모든 것들이 결국엔 내가 쌓아온 것들이다. 인생에는 리셋도, 불러오기도 없다. 그래서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짊어지기 싫은 것들을 짊어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고민이 깊어지는 게 아닐까? 없애버릴 수가 없기에 도망가려 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도망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단점이나 잘못된 점들도 모두 나와 하나다. 물론 잘못이나 단점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반성하되, 앞으로 한 발을 내딛지 발을 멈추거나 뒤로 달아나진 않을 것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치 이런 고민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을 것 같은 좋은 기분이다. 열심히 공부를 할 의욕도 갑자기 넘치는 것 같고, 지금 배가 고파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뭐든 식사도 맛있게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이 말을 전해주고 싶어 스누라이프에도 이 글을 올렸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려니, 문득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에서 이카리 신지(碇シンジ)가 되뇌이던 명대사(?)가 떠오른다. 도망치면 안돼![각주:3]

- 어느 추운 일요일, 어느 할일없는 학우가

  1. 파드마삼바바, 류시화 역, 정신세계사, 1997.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314 [본문으로]
  2. 論語 [爲政篇]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개인적으로 종심이라는 표현이 너무 마음에 뜻한 바와 같아 이를 삶의 목표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데 공자님조차 일흔에서야라니! [본문으로]
  3. 일본어 원문은 逃げちゃだめだ이다. [본문으로]
  Comments
  • 비밀댓글입니다
    • 사실 제 글에서 저 칼럼은 글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장치로서의 역할이고 글의 본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그리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워낙에 좋은 글이고 또 큰 줄기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 인용해 보았습니다. ^^;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트랙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__)
  • 비밀댓글입니다
    • 껄껄껄 그런 생활용어야 까먹을래야 까먹기가 어렵지만서도.. 그런데 그게 왜 생활용어임? 곧 승천하실 분께서 그런 말씀은 좀......
  • 비밀댓글입니다
    • 과찬이십니다. ㅎㅎ 저도 나이나 헛먹으면서 살았죠 ^^; 지금도 과히 다를 건 없습니다만.. 최소한 세상을 많이 산다는 건 어떻게든 경험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거고, 경험치가 쌓이면 그만큼 레벨업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공부만 하고, 단조로운 일상 속에 갇혀 있다 보니 사실 잘 모르겠지만요.

      저도 신입생 때에는 세상을 보는 눈도 좁았고, 생각하는 크기도 너무나 좁았기 때문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군대에 다녀오시면 좀 나아진..다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개인차도 있고, 또 무언가 준비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꼭 군대에 일찍 가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이제 새내기 생활도 끝나고 후배를 맞이하시게 되신다니 ^^ 멋진 선배로서의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새 학기 되시길!
  • 비밀댓글입니다
    • 어떤 자세에 대한 생각을 했다면, 말씀처럼 노력과 실천이 함께 따라주어야겠지요.

      전 어떤 때에는 생각없이 일상에 몰입해서 살다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서 마음이 편하지기도 하더라고요. ^^; 하지만 언제나 생각없이 살 순 없는데, 그럴 때에는 본문에 쓴 것 같은 결론을 언제나 떠올리곤 합니다.
  • 비밀댓글입니다
    • 그러게 말이죠,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경험들- 때로는 안 좋은 경험들도 분명 더 나은 자신을 위한 보약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10년지기 친구들 모임에서 옛날 이야길 하다 보면, 10년 전에는 정말 지금같으면 상상도 못할 황당한 성격이었다고 하더라고요. ㅎㅎ 하다못해 한 3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 성격과는 또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말이죠. 성격 뿐만 아니라, 가치관이나 성향도 꽤 바뀐 것 같습니다. 어쨌건 살아가는 날이 많아진 만큼, 경험치도 더 많이 쌓이고 레벨업도 하게 되는 거랄까요. 여튼, 말이 길어지네요. 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 AMY
    안녕하세요. 우연히 들어왔다가, 휴^^, 너무 구구절절 와닿는 글을 읽어게 되어서 자취를 남기고 갑니다.
    저는 서울대생은 아닙니다만 그동안 대학에서의 생활이 왜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고민을 하다보니 이렇게 후회 뿐인 인생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하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Lawlite 님 글을 읽으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것 같습니다. ㅎㅎ 위로 받고 감에 감사드려요.
    • 뭐 굳이 이런 내용이 서울대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 저나 제가 속해 있는 집단을 통해 글을 풀어내다보니 이런 제목이 붙어있는 것일 뿐이죠.

      후회라는 걸 하다보면, 끝도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사실 생각이 너무 많아도 세상 살기 피곤한 것 같습니다. 적당히 생각없이 살 때도 필요한 듯 싶죠... 자연스레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줄어들 것이고, 사실 후회라는 걸 백날 해봤자 시간을 돌릴 수도 없으니 차라리 생각을 안 하는게 좋다고나 할까요.

      즐거운 하루 하루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__)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 앞에서 완벽주의를 논하지 말라...( --)
    • 포기하면 편해라는 명대사를 떠올릴 때가......
    • 그나저나 이거 빌어먹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소!!
      그나마 불어 공부는 꾸준히 하고 있긴 한데...그게 거의 전부인 수준;;
      뭐 당장 내년에 붙을거란 생각으로 시작한건 아니었지만
      이거 진짜 돌겠구랴 ㅋㅋ
    • 국제무역론님이 출동하시면 리카도와 헥셔-올린 모형을 장착하신 마법봉으로 가히 신비한 화살을 하루종일 맞는 것과 같은 데미지를 내려주실 것이고, 국제수지론님이 출동하시면 은행원 김블쏜도 모를 이자율평가설이니 IS-LM-BP니 AA-DD니 하는 외계어들을 말씀해주시면서 과연 아웃랜드와 노스랜드와 아제로스와 칼림도어는 최적통화지역인지 의문을 던져주시게 될 것인데 벌써부터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니!!
  • 저도 지나가다가 이글을 봤는데요 아니 사실 lawlite님 글중 공감가고 와닿는글이 많아서 즐겨찾기에 추가해놨습니다 ㅠㅠ 이런글 올려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참 후회가 부질없다는걸 알면서도 그런생각이 한번 들게되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물고 수없이 늘어져 나중에는 무기력한상태로 빠져들게 되더라고요...나만 이런생각을 하는건가 왜이렇게 어리석은가 내자신을 한참미워하는중이었습니다만 저혼자 이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구나 하는 격한 공감에 댓글을 남겨요! 나름대로의 위안이 되었다고할까요 ㅠㅠ lawlite님은 이제 생각정리가 되신것같은데 전 이 얽혀버린 생각의 조각들을 어떻게 풀어놔야할지...막막해요.. 우리 다같이 화이팅합씨다~!!!ㅎㅎㅎ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