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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브룬 궁전의 글로리테 (Gloriette, Schloss Schonbrunn, Wien, Austria)
글로리테와 쇤브룬 궁전 정원

글로리테와 쇤브룬 궁전 정원, Photo by Lawlite

 '아름다운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쇤브룬 궁전(Schloß Schönbrunn)은 사실 큰 기대를 가지고 간 곳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유럽의 '궁전' 하면 누구나 프랑스의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고,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궁전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말이다. 그래서인지 쇤브룬 궁전은 '빈에 있으니까' 가 보는 곳-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한 때 유럽 전역을 떨쳐울렸던 합스부르크(Habsbrug) 제국의 찬란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본다는 생각으로 설레기도 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편견은 궁전 뒤편에 펼쳐진 아름다운 정원과, 저 멀리 언덕 높이 자리잡은 글로리테(혹은 글로리에테, Gloriette)를 보는 순간 여지없이 깨졌다! 마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of Austria, 1717-1780)의 느낌이 묻어있는 듯한 색색들이 아름다운 꽃들도 그렇지만 압권은 역시 글로리테였다. 멀리 솟은 장중한 모습의 건물, 정말 멋있었다. 글로리테를 보는 순간부터, 쇤브룬이 베르사유보다도 더 마음에 들었다.
글로리테(Gloriette)

Gloriette, Photo by Lawlite

 옛 프랑스어로 '작은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글로리테는 쇤브룬 궁전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폰 호헨베르크(J. von Hohenberg)에 의해 설계된 이 건축물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각주:1]과 7년 전쟁(1756-1763)[각주:2]의 결과로 얻은 평화를 기념하는 목적에서 1775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큰 영광도 아니고 작은 영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전쟁의 경과에 그 원인이 있는데- 오스트리아는 1759년 마침내 승기를 잡고 프로이센 군을 전쟁의 빌미가 되었던 슐레지엔(Schlesische)에서 몰아내고 승리하는 듯 했으나, 1762년 다시 전세는 뒤집혀 오스트리아는 결국 1763년의 후베르투스부르크(Hubertusburg) 조약을 통해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의 영토로 최종적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1740년부터의 전쟁을 통해 결과적으로 패배한 오스트리아가 얻은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일가의 제위를 보장받는 등의 명분 상의 이익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도 전쟁을 통해 얻은 평화라면 평화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다른 열강들에게 공인받았으니, 작은 영광은 된 셈이었을까?
 
글로리테에 새겨진 글(Photo by Schurl50, Wikipedia)

 글로리테의 간판인 양 씌어진 IOSEPHO II. AVGVSTO ET MARIA THERESIA AVGVSTA IMPERANTIB. ERECT. CIƆIƆCCLXXV라는 글은 황제 요제프 2세[각주:3]와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각주:4]의 통치하인 1775년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그 후 2차 대전의 전화(戰火) 속에 부서졌던 것을 전후에 복구하였다가 1995년에 다시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멋진 건물은 제정 시절에는 황제가 아침 식사를 하는 곳으로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카페로 사용되어, (돈을 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옛날 황제가 즐겼던 멋진 경치를 제공하고 있다.

 생각보다 제법 먼 언덕을 걸어 올라가며 더운 날씨에 땀을 흘렸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본 글로리테는 역시 멋있었고, 글로리테에서 바라본 쇤브룬 궁전과 빈 시가지도 장관이었으니까. 단, 예산과 시간 관계상 글로리테 카페엔 들어가 보지 못한 건 아쉬울 따름이다.

 만일 다시 가볼 날이 온다면- 글로리테와 쇤브룬 궁전의 정원은 정말 느긋하게 산책하며 시간을 만끽해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1. 아들이 없던 오스트리아의 카를 2세가 공주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자 같은 게르만 국가인 프로이센이 이를 문제삼아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패배로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이를 되찾고자 벌인 전쟁. [본문으로]
  3. Joseph II, 1741-1790.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본문으로]
  4.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가지고 있었고, 이를 1765년 요제프 2세가 계승했으므로 황제 요제프 2세, (프란츠 1세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물론 허울좋은 명예직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제외한 제국을 이루는 다른 지배자의 칭호들-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 국왕을 비롯한- 과 실권은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가 쥐고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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